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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인제의 백담사는 설악산 자락 깊숙이 자리한 사찰로, 겨울이 되면 하늘과 땅의 경계조차 사라지는 듯한 순백의 세계로 변한다. 눈이 내리면 세상은 멈추고, 오직 산과 절과 바람만이 존재한다. 불교의 고요와 설악의 장엄함이 맞닿은 그곳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침묵의 평화’를 배운다. 백담사의 겨울은 단순한 자연의 풍경이 아니라, 마음을 씻어내는 의식이자 인간의 본질을 마주하는 시간이다.

 

 

설악의 품속으로 들어가는 길, 눈과 침묵이 맞닿는 순간

인제읍에서 백담사까지 이어지는 길은 겨울이면 세상과 분리된 또 다른 세계로 변한다. 설악산 자락을 따라 난 길은 눈으로 덮여 있고, 나무들은 무거운 눈을 이고 묵묵히 서 있다. 차가 다닐 수 없는 구간은 걸어서 들어가야 하기에, 사람들은 자연스레 발걸음을 늦춘다.

그 길 위에서는 말소리가 필요 없다. 신발 밑의 눈이 내는 사각거림만이 유일한 대화다. 바람이 불면 나뭇가지 사이에서 눈이 흩날리며 작은 종소리 같은 소리를 낸다. 그 소리는 마치 오래된 절의 목탁 소리처럼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산길을 따라 걷는 동안, 세상의 소음은 완전히 사라진다. 오직 눈, 바람, 그리고 내 숨소리만이 남는다. 그 고요 속에서 사람은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백담사로 향하는 길은 단순한 산책이 아니라, 하나의 수행이다.

 

 

첫눈에 덮인 사찰, 흰 고요 속의 불빛

백담사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하얗게 덮인 대웅전의 지붕이다. 지붕의 곡선 위로 눈이 가지런히 내려앉고, 처마 끝에서는 고드름이 반짝인다. 대웅전 앞 마당에는 발자국 하나 없고, 부처님 앞의 향로 위로는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 연기는 하늘로 올라가며 안개와 섞이고, 곧 흩어진다.

절집 안에서는 스님들이 조용히 독경을 하고 있다. 그 낭랑한 소리는 마치 겨울의 바람과 어울려 울린다. “나무아미타불…” 그 반복되는 진언이 눈 덮인 산속에 퍼지면, 세상 전체가 하나의 기도문이 된다.

햇빛이 잠시 비치면 사찰의 기와가 은빛으로 빛나고, 나무 사이로 흰 연기가 흩어진다. 그 순간, 백담사는 단순한 종교 공간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로 존재한다. 인간과 자연, 신성함과 침묵이 완벽하게 겹쳐지는 순간이다.

 

 

강물 위로 내리는 눈, 흘러도 멈춘 듯한 시간

백담사 앞으로는 작은 계곡이 흐른다. 여름에는 시원한 물소리가 울려 퍼지지만, 겨울에는 그 소리조차 깊은 침묵 속으로 들어간다. 물은 얼어붙었지만 완전히 멈추지는 않는다. 얼음 아래로 여전히 흐르는 물줄기가 낮게 울린다. 그 소리는 마치 마음속에 묻혀 있던 기억의 속삭임 같다.

계곡 위의 바위들은 눈으로 덮여 있어 마치 하얀 쿠션처럼 부드럽다. 바위 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얼며 투명한 고드름이 된다. 그 고드름은 낮에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밤에는 달빛을 머금는다. 낮과 밤, 빛과 어둠이 같은 공간에서 교차한다.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의 흐름이 느려진다. 실제로는 물이 흐르고 있지만, 그 흐름이 너무 조용해서 멈춘 것처럼 느껴진다. 백담사의 겨울은 그렇게, ‘정지된 흐름’의 미학을 보여준다.

 

 

눈 속의 법당, 사람의 온기가 남는 자리

백담사의 겨울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은 법당 안의 온기다. 차가운 바깥 공기와 달리 법당 안은 따뜻하다. 아궁이의 불이 은근하게 타고, 그 열이 바닥을 데운다. 나무 바닥 위에 앉으면 몸의 온도보다 마음이 먼저 풀린다.

스님들은 새벽마다 불을 지피고, 하루 세 번의 예불을 올린다. 그 모습은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수행의 일상이다. 겨울의 법당은 고요하지만, 그 고요함 속에는 수많은 기도와 숨결이 스며 있다.

방문객들도 이 온기를 느낀다. 추운 바깥에서 들어와 합장을 하고 잠시 눈을 감으면, 세상의 무게가 내려놓아지는 기분이 든다. 그 온기는 단순한 열이 아니라, 존재의 위로다.

 

 

설경의 산사, 색이 사라진 아름다움

백담사의 설경은 색이 없다. 하늘도, 산도, 절도 모두 흰빛으로 덮여 있다. 하지만 그 무채색의 세계는 오히려 더 풍부하다. 색이 사라지자 형태가 드러나고, 소리가 사라지자 본질이 들린다.

기와지붕의 곡선, 나무 기둥의 결, 눈 위의 작은 새 발자국까지 모든 것이 선명해진다.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예술보다 정교하고, 완벽하다. 자연은 그 자체로 이미 완성된 작품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사진을 찍기보다 오래 바라본다. 바라보는 행위 자체가 수행이 된다. 침묵 속에서만 들리는 ‘눈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노을이 산을 물들일 때, 겨울의 마음이 빛난다

해가 기울 무렵, 백담사의 설경은 또 다른 색으로 변한다. 눈 위에 붉은빛이 스며들고, 기와 위에는 금빛이 반짝인다. 산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나며 절집을 감싼다. 그 순간, 세상은 마치 숨을 멈춘 듯 고요하다.

스님 한 분이 대웅전 앞에서 향을 피운다. 그 연기가 붉은 노을과 뒤섞여 하늘로 오른다. 향 냄새는 바람을 타고 퍼지고, 그 향 속에는 시간의 무게가 담겨 있다.

이 풍경은 하루의 끝이 아니라, 하나의 완성이다. 백담사의 겨울은 그렇게 하루마다 완전한 풍경을 완성하며, 그 속에서 인간의 마음도 조금씩 맑아진다.

 

 

달빛이 내리는 밤, 사찰이 잠드는 시간

밤의 백담사는 말 그대로 ‘침묵의 절정’이다. 달빛이 눈 위를 비추고, 산의 그림자가 고요히 늘어선다. 절집 안에서는 등불이 희미하게 타오른다. 불빛이 벽을 따라 퍼지며 나무의 결을 드러낸다.

스님들은 모두 예불을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다. 멀리서 들려오는 목탁 소리 하나, 그리고 바람 소리 하나. 그것이 전부다. 그 적막 속에서 오히려 생명이 느껴진다.

달빛 아래서 본 백담사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다. 모든 것이 단순하고 명확하다. 불필요한 욕망과 잡음이 사라진 자리에서, 진짜 삶이 드러난다.

 

 

백담사의 겨울이 가르쳐주는 것

백담사의 겨울은 우리에게 침묵의 가치를 일깨워준다. 말이 줄어들수록 마음은 깊어진다. 소리를 내지 않아도 모든 것이 존재의 언어로 이야기한다. 바람, 눈, 향, 불빛 — 그것들이 합쳐져 하나의 진언이 된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배운다. 멈추는 것, 느려지는 것, 그리고 비워내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 백담사의 설경은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삶의 리듬을 다시 맞추는 계절의 교훈이다.

봄이 오면 눈은 녹고 새싹이 돋겠지만, 백담사의 겨울은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남는다. 그것은 눈처럼 차갑지 않고, 불빛처럼 따뜻한 기억으로 남는다. 결국, 이 산사가 전하는 메시지는 단 하나다 — “고요 속에서 비로소 세상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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