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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 설악산의 겨울은 한국의 자연이 가진 정점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사계절 중에서도 설악의 겨울은 가장 고요하고, 가장 웅장하다. 산 전체가 눈으로 뒤덮이고, 암봉마다 하얀 서리가 내려앉으며, 하늘과 산의 경계가 사라진다. 한 걸음마다 바람이 차갑게 스치지만, 그 바람 속에는 설악의 생명이 담겨 있다. 눈 덮인 공룡능선, 얼어붙은 천불동 계곡, 그리고 고요히 잠든 울산바위 — 이 모든 풍경은 겨울의 침묵 속에서 더욱 강렬하게 빛난다.

첫눈이 내린 날, 설악의 숨결이 깨어나다
설악산의 겨울은 첫눈과 함께 시작된다. 11월 말에서 12월 초, 첫눈이 내리는 날이면 산은 단숨에 흰 옷을 입는다. 나무 가지마다 눈이 쌓이고, 능선의 윤곽이 부드러워진다. 이 시기 설악의 하늘은 유난히 높고 맑다. 바람 한 점 없는 새벽, 흰 눈 위로 태양이 떠오를 때, 산 전체가 금빛으로 물들며 하루가 시작된다.
등산객들은 새벽같이 국립공원 입구로 향한다. 발밑의 눈이 사각거리고, 나무 사이로 새들의 날갯짓이 들린다. 공기는 차지만 그 안에는 설악산 특유의 생기와 기운이 흐른다. 첫눈 이후의 설악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보인다. 산이 숨을 쉬고, 나무가 말을 걸고, 바람이 노래한다.
그날의 설악은 조용하지만, 그 조용함이 오히려 더 강렬하다. 눈이 덮인 바위 하나, 얼어붙은 나뭇잎 하나까지도 존재의 이유를 드러낸다. 산은 인간에게 말한다. “이 고요함 속에서 네 마음도 잠시 멈추어라.”
공룡능선, 바람과 얼음의 신화
설악산의 대표적인 능선인 공룡능선은 겨울이 되면 다른 세상이 된다. 날카로운 바위들은 눈과 얼음에 덮여 마치 하얀 비늘을 두른 용처럼 보인다. 그 풍경은 장엄하고, 동시에 아찔하다. 한 걸음마다 바람이 불어오고, 발밑에서는 얼음이 바스락거린다. 등산객의 숨결은 허공에 하얗게 흩어진다.
공룡능선은 이름 그대로 ‘산의 등뼈’라 불릴 만큼 험준하다. 그러나 겨울의 공룡능선은 그 거칠음 속에 고요가 깃든다. 바람이 만들어낸 얼음 조각들은 마치 조각가의 손길처럼 섬세하고, 빛을 받으면 유리처럼 반짝인다. 하늘과 맞닿은 봉우리에서는 구름이 빠르게 지나가며, 순간순간 다른 풍경을 만든다.
이 능선을 오르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말을 남긴다. “이곳에 서면 시간이 멈춘다.” 그것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실제의 감각이다. 고요한 바람 속에서,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 인간의 존재는 작아지고 대신 자연의 위대함이 채워진다. 설악의 겨울은 그렇게 인간을 겸허하게 만든다.
천불동 계곡, 얼음으로 빚은 예술의 골짜기
설악산을 대표하는 또 다른 겨울의 명소는 천불동 계곡이다. 이름처럼 천 개의 부처가 앉아 있는 듯한 바위와 암석이 계곡을 따라 늘어서 있다. 여름에는 물소리가 요란하지만, 겨울이 되면 그 물이 얼어붙으며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된다. 얼음 폭포, 얼음 기둥, 그리고 얼음 위의 눈꽃 — 마치 신이 직접 만든 조각품 같다.
계곡을 따라 걷다 보면 곳곳에서 얼음 사이로 물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낮고 잔잔하지만, 귀를 기울이면 리듬이 있다. 물이 얼면서 만들어내는 그 음색은 자연의 음악이다. 햇빛이 계곡 사이로 들어오면, 얼음은 순간적으로 푸른빛을 띠며 반짝인다. 그때의 천불동은 말 그대로 ‘얼음의 신전’이다.
이곳의 풍경은 늘 변한다. 낮에는 햇빛이 녹이고, 밤에는 다시 얼린다. 그 반복 속에서 얼음은 조금씩 다른 형태로 자라난다.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완벽한 형태, 그것이 설악의 겨울 예술이다.
울산바위, 하늘과 맞닿은 설경의 절정
속초 시내에서도 멀리 보이는 울산바위는 겨울이 되면 그 존재감이 더욱 강렬해진다. 해발 873미터의 암봉이지만, 눈이 내린 날에는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성벽처럼 보인다. 아침에는 흰빛으로, 오후에는 은빛으로, 해질 무렵에는 붉은빛으로 물든다. 하루에도 세 번, 전혀 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바위를 오르는 길은 가파르지만, 그 끝에서 바라보는 설경은 모든 수고를 잊게 만든다. 아래로는 속초의 겨울 바다가 펼쳐지고, 뒤로는 설악의 산맥이 이어진다. 바다와 산, 하늘이 한 화면에 들어오는 순간 — 그 장관 앞에서 사람들은 자연스레 침묵한다.
울산바위의 겨울은 단순히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인간의 존재를 뛰어넘는 규모와 에너지다. 바람은 거세지만, 그 바람 속에 맑은 기운이 흐른다. 눈송이가 바위에 닿아 녹고, 다시 얼며, 수없이 많은 형태를 만들어낸다. 그 모든 과정이 설악의 겨울을 완성한다.
설악의 생명, 침묵 속에서 이어지는 호흡
겨울의 설악은 얼음과 눈으로 뒤덮여 있지만, 그 속에서도 생명은 숨 쉬고 있다. 고산지대의 주목나무는 영하 20도의 추위에도 붉은 열매를 맺고, 눈 속에서도 꿋꿋하게 서 있다. 작은 동물들의 발자국이 눈 위에 남고, 까마귀와 솔개는 매서운 바람 속을 가로지른다.
등산로를 따라 걷다 보면 눈 위에 찍힌 동물의 흔적을 자주 볼 수 있다. 그것은 눈이 내려도, 바람이 불어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명의 증거다. 인간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도 설악은 살아 있고, 그 살아 있음이 겨울의 진짜 아름다움이다.
이곳의 생명은 조용하다. 화려하지 않고, 소리 내지 않는다. 하지만 그 고요함 속에는 ‘존재의 강인함’이 있다. 설악산은 매년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방법으로 겨울을 견디고 봄을 기다린다. 그 인내의 시간은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이다.
노을의 시간, 산이 붉게 타오를 때
설악산의 겨울 노을은 하루의 피날레다. 해가 산 너머로 넘어가면, 하늘은 주황색과 붉은색이 뒤섞인 색으로 변한다. 그 빛이 눈 위에 반사되면, 산 전체가 불타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 불빛은 따뜻하지 않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빛나는 냉정한 아름다움이다.
이 시간대에 서 있으면 시간의 감각이 사라진다. 붉은빛이 천천히 사라지고, 산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나며, 세상은 점점 푸른 어둠으로 물든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 아무 말 없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눈앞의 풍경에 자신을 맡긴다.
설악의 노을은 화려함보다 ‘여운’으로 남는다. 그 빛은 빠르게 사라지지만, 마음속에는 오래 머문다. 그것은 마치 한 편의 시와 같다 — 읽는 순간보다 읽고 난 후에 더 깊게 울리는 문장처럼.
결국, 겨울의 설악이 가르쳐주는 것
속초 설악산의 겨울은 ‘침묵의 미학’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바람과 눈, 얼음과 바위, 모든 것이 서로 부딪히지 않고 공존한다. 그 조화 속에서 인간은 배운다. 세상은 소리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고요로도 흐를 수 있다는 것을.
설악의 겨울을 걷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정화된다. 세상의 번잡함이 멀어지고, 오직 바람과 눈의 리듬만이 남는다. 그것이 바로 이곳이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이유다. 겨울의 설악은 차갑지만, 그 차가움 속에 따뜻함이 있다.
설악의 겨울이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멈추어도 괜찮다. 그 속에서도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게 흐르고 있다.” 얼음이 녹고 눈이 사라져도, 설악의 겨울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눈의 계절이 아니라, 깨달음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