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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붉은 단풍이 막 사그라질 즈음, 설악산에는 해마다 첫눈이 내린다. 산자락을 따라 아직 남아 있는 단풍 위로 흰 눈이 내려앉는 순간, 그곳은 계절이 겹쳐 있는 듯한 풍경으로 변한다. 파란 하늘 아래 흩날리는 눈송이, 바위와 나무에 내려앉은 흰빛, 그리고 바람 속에 스며든 한기까지 — 설악산의 첫눈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한 해의 계절이 서로 인사하는 의식 같다.

 

 

가을의 끝, 첫눈이 내리는 순간

설악산의 첫눈은 대개 10월 하순에서 11월 초순 사이에 내린다. 그 시기 산 아래는 여전히 단풍이 남아 있고, 정상 부근에는 이미 겨울의 기운이 감돈다. 그래서 첫눈이 내릴 때면 붉은 단풍과 흰 눈이 한 화면에 담긴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이 극적인 대비는 설악산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장관이다.

아침 일찍 권금성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면, 아직 이른 시간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첫눈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바위 틈마다 쌓인 눈이 반짝이며, 멀리 보이는 대청봉 정상은 이미 하얗게 덮여 있다. 단풍이 물든 계곡과 설산의 흰 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마치 계절의 경계를 한눈에 보는 듯하다.

설악산의 첫눈은 조용히 내린다. 거센 바람도, 요란한 비도 없이, 오히려 고요하게 산을 덮는다. 그 고요함 속에서 들려오는 건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 발밑의 눈이 밟히는 소리뿐이다. 그것은 자연이 사람에게 보내는 ‘멈춤의 신호’처럼 느껴진다.

 

 

첫눈이 만들어내는 설악의 풍경

첫눈이 내린 설악산은 색의 층위가 뚜렷하다. 아래쪽은 아직 단풍이 남아 붉고, 중턱에는 서리가 내려 은빛으로 반짝이며, 정상부는 완전히 흰 눈으로 덮인다. 이 세 가지 색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마치 동양화의 농담처럼 부드럽고 깊다.

흔히 ‘단풍과 눈이 함께 있는 산’이라 하면 설악산을 떠올린다. 공룡능선을 따라 걷는 탐방객들은 붉은 숲길을 지나 하얀 봉우리로 향한다. 그 여정은 가을에서 겨울로 들어서는 길과도 같다. 바람이 불면 눈송이가 흩날리며 단풍잎 위로 내려앉고, 햇살이 비칠 때면 그 눈이 서서히 녹으며 반짝인다.

특히 ‘천불동 계곡’ 구간은 첫눈이 내린 뒤 가장 아름답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위로 눈송이가 떨어지고, 얼기 시작한 바위 위로 단풍잎이 붙어 있다. 물소리, 바람소리, 눈이 녹는 소리가 한데 섞여 ‘겨울의 서곡’을 들려준다. 이곳의 첫눈은 그렇게 청각으로도 느껴진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

설악산의 첫눈 소식이 들리면 전국에서 산행객들이 모여든다. 누군가는 첫눈을 직접 보기 위해, 누군가는 사진 속 추억을 남기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그러나 정작 많은 이들이 말한다. 설악산의 첫눈은 ‘보는 것’보다 ‘느끼는 것’이라고. 눈이 내리는 순간의 정적, 차가운 공기 속에 스며든 흙냄새, 그리고 손끝에 닿는 서늘한 감촉이 그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

설악산 국립공원 측은 첫눈 예보가 발표되면 일부 탐방로를 제한하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산은 한층 고요해진다. 사람의 발자국이 적은 길에는 눈이 더 두껍게 쌓이고, 그 위로 동물의 흔적이 남는다. 이 자연스러운 순환 속에서 인간은 관찰자가 된다.

등산로를 걷다 보면 종종 나무 사이로 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물안개이자, 계절이 바뀌는 증거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고르고, 조용히 계절의 소리를 듣는다.

 

 

눈이 그린 설악의 고요한 예술

첫눈이 내린 설악산은 소리의 세계다. 멀리서 들려오는 물소리, 눈송이가 나뭇가지에 닿는 소리, 그리고 사람의 발걸음이 눈 위를 누르는 소리까지. 모든 소리가 부드럽고 낮다. 그래서 설악산의 겨울은 다른 산보다 고요하다.

설악동에서 대청봉으로 이어지는 길은 첫눈 이후 완전히 다른 세계로 바뀐다. 나무의 가지마다 눈이 얹혀 마치 수묵화의 선처럼 얇고 정갈하다. 아침 햇살이 비치면 눈이 반사되어 숲 전체가 은빛으로 빛나며, 그 빛이 계곡을 따라 흘러내린다. 이 장면은 마치 자연이 직접 만든 조명처럼 신비롭다.

이때 만약 운이 좋다면, 산 중턱에서 ‘운해(雲海)’를 볼 수 있다. 구름이 계곡 아래로 흐르고, 그 위로 눈 덮인 봉우리들이 떠 있는 듯 보인다. 그 풍경은 현실이라기보다 꿈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설악산의 첫눈은 단지 겨울의 시작이 아니라, 자연이 만들어낸 한 편의 시다.

 

 

결국 첫눈이 남기는 감정의 잔상

첫눈은 늘 설렘을 동반하지만, 설악산의 첫눈은 그보다 더 깊은 울림을 남긴다. 그것은 ‘끝’과 ‘시작’이 동시에 존재하는 순간이다. 가을의 마지막 빛이 남은 숲 위로 겨울의 흰 눈이 내려앉으며, 두 계절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듯한 장면을 만든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자연의 순환을 본다. 사라짐이 곧 새로운 시작임을, 떨어지는 잎 위에 내리는 눈이 그 증거임을. 그래서 설악산의 첫눈은 단순히 풍경이 아니라, 삶의 비유이기도 하다. 산 아래로 내려오는 길, 발자국마다 남은 눈이 천천히 녹아 사라질 때, 마음 한켠에는 여전히 하얀 여운이 남는다. 그것이 설악산이 주는 겨울의 첫 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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