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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속초 설악산은 사계절 모두 아름답지만, 겨울에는 그 빛이 유난히 깊어진다. 그 중심에는 권금성 케이블카가 있다. 바람이 매서운 계절에도 이 케이블카는 하늘로 향한다. 창밖으로 보이는 설악의 능선, 눈 덮인 소나무, 그리고 얼음으로 굳은 계곡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펼쳐진다. 설악산의 겨울은 인간이 감히 꾸밀 수 없는 자연의 순수한 예술이며, 권금성 케이블카는 그 예술의 중심으로 안내하는 문이다.

 

 

설악으로 향하는 길

서울에서 출발해 속초로 향하는 길은 점점 색을 잃어간다. 도심의 네온빛이 사라지고, 차창 밖 풍경은 회색과 흰색으로 채워진다. 설악산에 가까워질수록 공기는 차가워지고, 바람은 강해진다. 고개를 돌리면 멀리 하얀 산의 능선이 보인다. 그것이 바로 겨울의 문턱, 설악의 시작이다.

속초 도심을 지나 국립공원 입구로 들어서면, 이미 눈이 쌓여 있다. 여행객들은 두꺼운 옷을 입고 손을 비비며 입구 매표소로 향한다. 산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설악산은 거대하고 고요하다. 산 전체가 눈을 머금은 채 숨을 죽이고 있다. 케이블카는 이 거대한 설경 속으로 오르는 유일한 길이다.

사람들은 표를 들고 줄을 선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아이들은 손을 잡은 채 들뜬 표정을 짓는다.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겨울의 하늘로 이어지는 철제 케이블이 반짝인다.

 

 

하늘로 향하는 철의 길

케이블카 문이 닫히는 순간, 바깥의 소리가 사라진다. 대신 철이 움직이는 소리, 철제 바퀴가 케이블을 따라 미끄러지는 소리만 남는다.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하면, 설악산의 겨울 풍경이 아래로 펼쳐진다.

처음에는 눈 덮인 숲이 지나간다. 소나무 가지마다 쌓인 눈은 마치 하얀 꽃이 핀 듯하다. 바람이 불면 눈송이가 흩날려 유리창에 부딪힌다. 그 한 알 한 알의 눈송이마다 겨울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듯하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풍경은 점점 달라진다. 산 아래에서 보던 풍경은 이제 수평선처럼 내려다보인다. 흰 구름이 아래로 흐르고, 멀리 동해가 희미하게 빛난다. 케이블카 안의 사람들은 말을 잃는다. 사진을 찍으려던 손이 잠시 멈추고, 모두의 시선은 하늘과 산 사이의 경계로 향한다.

그 순간, 케이블카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하나의 명상 공간이 된다. 세상의 소음이 사라지고, 남는 것은 오직 자연의 숨결뿐이다.

 

 

눈 덮인 권금성

케이블카가 멈추는 곳, 바로 권금성이다. 해발 약 700미터 지점에 자리한 이곳은 설악산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이자, 수백 년 동안 자연이 지켜온 요새 같은 곳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그 바람에는 설악의 냄새가 묻어 있다 — 눈, 바위, 송진, 그리고 겨울의 공기. 눈 위를 밟는 순간, 발끝에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난다. 그것은 이곳에 발을 디뎠다는 실감이자, 겨울이 주는 첫 인사다.

전망대에 오르면 산의 능선이 끝없이 이어진다. 눈 덮인 봉우리들은 하늘과 맞닿아 있고, 멀리 대청봉이 보인다. 산의 형태가 선명하지만, 눈 덮인 곡선은 부드럽고 우아하다. 설악의 겨울은 날카롭지 않다. 오히려 모든 것을 감싸 안는다.

 

 

 

바람의 고성, 권금성

권금성 정상에는 오래된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바위 위에 쌓인 눈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그 흔적은,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은 시간의 상징이다.

바람은 거세지만, 그 속에서도 묘한 평화가 있다. 사람들은 말을 아끼고, 그저 하늘을 바라본다. 누군가는 절벽 끝에 서서 사진을 찍고, 누군가는 두 손을 모아 기도하듯 눈을 감는다.

이곳의 침묵은 단순한 고요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무게다. 수백 년 동안 이 산이 지켜온 계절의 순환, 인간이 감히 다 헤아릴 수 없는 자연의 기억이 바람 속에 담겨 있다.

눈발이 흩날릴 때면 권금성은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다. 그 모습은 마치 꿈처럼 흐릿하고, 신비롭다.

 

 

하얀 산과 푸른 바다

권금성 전망대에서 가장 특별한 장면은 ‘산과 바다’가 동시에 보인다는 것이다. 눈 덮인 설악의 봉우리들 뒤로 동해의 푸른 선이 희미하게 펼쳐진다.

겨울의 바다는 잔잔하지만 묵직하다. 구름이 낮게 깔려 있고, 햇빛이 잠시 비치면 물결 위로 은빛이 번진다. 산의 흰색과 바다의 푸른색이 하나의 화면 안에 공존할 때, 사람들은 이 조화에 말을 잃는다.

이곳에서는 바다가 하늘처럼 보이고, 하늘은 바다처럼 느껴진다. 그 경계의 모호함 속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아지고, 동시에 자유로워진다.

 

 

눈길 위의 길

케이블카로 내려오기 전, 사람들은 잠시 숲길을 걷는다. 권금성 주변의 산책로는 겨울철에도 열려 있으며, 짧지만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눈 덮인 소나무숲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고, 바람은 낮은 소리로 운다.

발 아래의 눈은 부드럽고, 공기는 맑다. 누군가는 손을 내밀어 눈송이를 받아본다. 그것은 찰나에 녹지만, 그 순간의 감촉은 오래 남는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작은 정자가 있다. 그곳에 앉아 숨을 고르면, 세상의 시간이 멈춘 듯하다. 마음속의 생각들도 잠시 내려놓게 된다. 설악의 겨울은 그렇게 사람을 비운다. 비움 속에서 오히려 충만이 피어난다.

 

 

케이블카 아래로 흐르는 시간

돌아오는 길, 케이블카는 천천히 산을 내려간다. 올라올 때와는 전혀 다른 감정이 흐른다. 올라올 때는 설렘이 있었다면, 내려가는 길에는 아쉬움이 있다. 산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눈 덮인 마을, 작은 강,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보인다.

케이블카가 멈추는 순간, 사람들은 현실로 돌아온다. 하지만 마음 한켠은 여전히 산 위에 남아 있다. 눈과 바람, 그리고 그 고요한 순간의 기억이 가슴 속에 머문다.

누군가는 말한다. “내년에도 다시 오고 싶다.” 그것은 단순한 소망이 아니라, 자연과 맺은 약속이다. 설악의 겨울은 그렇게 사람을 붙잡는다.

 

 

설악의 겨울밤 빛과 고요가 어우러진 풍경

속초 시내로 돌아와도 설악산의 여운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해가 지면 산의 능선은 어둠 속으로 잠기고, 도시의 불빛은 바다 위에 반사된다. 호텔 창문 너머로 바라본 설악은 낮보다 더 깊은 색을 띤다.

밤의 설악은 말이 없다. 하지만 그 침묵이야말로 하루를 완성시킨다. 사람들은 조용히 차 한 잔을 마시며, 낮 동안 보았던 눈빛을 떠올린다.

그 빛은 단지 태양의 빛이 아니다. 그것은 눈이 반사한 빛, 산이 품은 빛, 그리고 인간의 마음속에서 반짝인 빛이다. 겨울의 설악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다.

 

 

설악이 들려주는 겨울의 언어

설악산의 겨울은 화려하지 않다. 그것은 절제의 미학이다. 흰 눈이 모든 것을 덮고, 산은 그 속에서 본래의 형태를 드러낸다. 권금성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며 마주한 풍경은, 인간이 자연 앞에서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일깨워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작음 속에서 위안을 찾는다. 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침묵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이야기는 바람이 대신하고, 눈이 대신 전한다.

케이블카가 멈추고, 여행이 끝난 뒤에도 사람들은 그 풍경을 잊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본 것’이 아니라 ‘느낀 것’이기 때문이다. 설악의 겨울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경험하는 계절이다.

 

설악산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모든 것은 잠시지만, 그 잠시가 영원보다 깊을 수 있다.” 권금성 위의 바람은 그렇게 한겨울에도 쉼 없이 흘러간다. 그리고 그 바람 속에는 아직도 누군가의 숨결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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